이 비석의 제액(題額)은 [고려국 대화엄 부석사 주지 증시현오국사비명 병서(高麗國大華嚴浮石寺住持贈諡玄俉國師碑銘 幷序)]이다. 비신(碑身)은 높이 1.88m 너비 0.97m의 점판암으로, 화강암의 부석(趺石)위에 세워졌으며, 이수( 首)는 없다. 제액(題額)의 글자는 지름 약 8㎝의 전서(篆書)이며, 본문은 3.3㎝의 해서(楷書)이다. 제액 다음 행문(行文)에 찬자(撰者)와 서자(書者)를 다음과 같이 명기(明記) 하였다.
「朝散大夫左散騎常侍翰林學士寶文閣學士知 制誥兼 太子賓客 賜紫金魚袋臣 李知命」「入內侍?將作少監國學直講充史館修撰官兼 太子中允賜紫金魚袋臣 柳公權」이 기록을 통해 「서봉사 현오국사탑비」의 본문을 지은 이는 이지명(李知命)이며, 글씨를 쓴 이는 고려 때 초서(草書)로 유명한 유공권(柳公權)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의 말미(末尾)에 「大定二十五年 乙巳二月 日門入等奉 宣銷峰寺立石 興王寺大師 敏求 刻字」라는 기록이 있는데, 대정(大定) 25년은 명종 15년(1185) 으로서 현오국사가 시멸(示滅)한지 7년 후이다. 흥왕사(興王寺)의 대사(大師)인 민구(敏求)가 각자(刻字) 하였음도 확인할 수 있다.
비석의 조형은 보경사원진국사비(寶鏡寺圓眞國師碑), 억정사대지국사비(億政寺大智國師碑), 보광사중창비(寶光寺重創碑)와 같이 윗변의 양각(兩角)을 귀접이한 규형(圭形)이고, 지대석(地臺石)도 4변을 접었다. 개석(蓋石)과 여러 조식(彫飾)을 생략한, 고려말 석비(石碑)의 새로운 계류(系流)를 형성하는 좋은 사례이다.
명문(銘文)에 의하면 현오국사는 고려 중기의 승려로 휘(諱)는 종린(宗璘), 자(字)는 중지(重之)이며, 속성(俗姓)은 왕씨(王氏)이다. 어려서부터 기량이 뛰어나고 심대하였다. 15세에 불일사(佛日寺)에서 수계(受戒)하고 의종(毅宗) 원년(1147)에 수좌(首座)가 되었다.
명종(明宗)은 원년(1171) 중추(仲秋)에 그에게 좌세(佐世)의 호(號)를 내리고, 내전(內殿)에 불러들여 가사(袈裟)한 벌을 하사하였다.명종 8년(1178) 7월에 53세 나이, 법랍(法臘) 39세로 시멸(示滅)하였다.
명종은 매우 애통해하며 최광유(崔光裕) 등을 보내어 국사(國師)를 봉하고, 시호(諡號)를 현오(玄悟)라 하였다. 같은 달 17일에 동림(東林) 산기슭에 다비(茶毘)하였다. 현오국사는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여풍(餘風)을 이은 대표적인 고승(高僧)이다.